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ㅣ 한 강 저 ㅣ 문학과지성사 ㅣ 2013. 11. 15
* 책 소개
심해의 밤, 침묵에서 길어 올린 핏빛 언어들
상처 입은 영혼에 닿는 투명한 빛의 궤적들
인간 삶의 고독과 비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맞닥뜨리는 어떤 진실과
본질적인 정서들을 특유의 단단하고 시정 어린 문체로 새겨온 한강이
첫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를 출간했다.
올해로 등단 20년차인 한강은 그간 여덟 권의 소설 단행본을 출간하는 틈틈이
쓰고 발표한 시들 가운데 60편을 추려 이번 시집을 묶었다.
「저녁의 소묘」 「새벽에 들은 노래」 「피 흐르는 눈」 「거울 저편의 겨울」 연작들의
시편 제목을 일별하는 것만으로도 그 정조가 충분히 감지되는 한강의 시집은,
어둠과 침묵 속에서 더욱 명징 해지는 존재와 언어를 투명하게 대면하는 목소리로 가득하다.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에는 침묵의 그림에 육박하기 위해 피 흘리는 언어들이 있다.
그리고 피 흘리는 언어의 심장을 뜨겁게 응시하며 영혼의 존재로서의 인간을 확인하려는 시인이 있다.
그는 침묵과 암흑의 세계로부터 빛나는 진실을 건져 올렸던 최초의 언어에 가닿고자 한다.
이 시집은 그간 한강 문학을 이야기할 때 언급돼온 강렬한 이미지와 감각적인 문장들
너머에 자리한 어떤 내밀한 기원-성소에 한 발 가까이 다가가는 주춧돌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예스24 제공]
* 책 리뷰
처음으로 한강 작가님의 책을 읽었을 때가 떠오른다.
뉴스에서는 한강 작가님이 국내 작가 최초로 맨 부커상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그렇게 <채식주의자>라는 책을 접하게 됐다.
책을 읽고 난 뒤 몇 일간 충격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
끊임없는 내면 속 철학적 궁금증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괴롭혔던 기억이 난다.
한강 작가의 첫 시집<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는 소설가가 아닌
시인 한강이 내놓은 자신의 정체성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는 내내 한강 작가는 내게 소설가가 아닌 온전한 시인이었다.
<채식주의자>를 읽으며 받았던 충격은 저 먼 지평선을 따라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 어느 늦은 저녁 나는
책 서두에 적힌 시인의 말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어떤 저녁은 투명했다.
(어떤 새벽이 그런 것처럼)
불꽃 속에
둥근 적막이 있었다.
시를 한편, 두편 읽으며 책장을 넘기는데 어째서
저녁과 침묵(혹은 적막)이 이리도 닮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저녁은 피투성이
(어떤 새벽이 그런 것처럼)
가끔은 우리 눈이 흑백 렌즈였으면
흑과 백
그 사이 수없는 음영을 따라
어둠이 주섬주섬 얇은 남루들을 껴입고
외등을 피해 걸어오는 사람의
평화도,
오랜 지옥도
비슷하게 희끗한 표정으로 읽히도록
외등은 희고
외등 갓의 바깥은 침묵하며 잿빛이도록
그의 눈을 적신 것은
조용히, 검게 흘러내리도록
- 저녁의 소묘
한 강 작가님의 시에서 언어는 '눈물'이고 '피'다.
'영혼'일 수도 있겠다.
강렬한 문장들로 이루어진 한 강 작가님에 시는
오직 영혼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선사한다.
나는 피 흐르는 눈을 가졌어.
그밖에 뭘 가져보았는지는
이제 잊었어.
달콤한 것은 없어.
씁쓸한 것도 없어.
부드러운 것,
맥박 치는 것,
가만히 심장을 문지르는 것
무심코 잊었어, 어쩌다
더 갈 길이 없어.
모든 것이 붉게 보이진 않아, 다만
모든 잠잠한 것을 믿지 않아, 신음은
생략하기로 해
난막(卵膜)처럼 얇은 눈꺼풀로
눈을 덮고 쉴 때
그때 내 뺨을 사랑하지 않아.
입술을, 얼룩진 인중을 사랑하지 않아.
나는 피 흐르는 눈을 가졌어.
- 피 흐르는 눈
* 책아저씨가 뽑은 책 속 한 줄
이제
살아가는 일은 무엇일까
물으며 누워 있을 때
얼굴에
햇빛이 내렸다
빛이 지나갈 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가만히
- 회복기의 노래